지난주일 오후 파킹랏 한쪽에 위치한 염소우리가 시끄럽다. 남녀노소로 이루어진
수십 명이 꼼짝도 않고 무엇인가에 집중하다가 소리도 지른다. 누군가가 한마디
하면 누군가가 대답하며 집중한다. 염소의 출산을 바라보는 광경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환호 속에 염소남매가 태어났다. 엄마는 갈색이고 아빠는 검은색인데 남매는 검은색과 금빛 갈색이 어우러진 것이 너무 예쁘다. 그리고 건강해 보인다. 아이들과 염소의 출산을 바라본 부모님들은 아이들에게 무슨 교육이라도 한 듯 흐뭇해하신다.
그런데 텍사스에 한파가 밀려왔다. 새벽기도 후 집사님들이 염소우리에 가보니 새끼들이 추위에 떨고 있어서 상자에 담아 따뜻한 사무실로 옮겼다. 그리고는 저녁에 다시 사무실로 옮길 예정으로 한낮동안 어미젖을 먹이기 위해 엄마 곁에 보냈다.
그리고 축사를 관리하는 집사님이 저녁에 가보니 한 마리는 이미 죽어있었고 한 마리는 죽어가고 있었다. 어미의 모성애를 믿었는데 갑자기 밀어닥친 한파 앞에서 어미도 어쩔 수 없었나 보다. 그래서 죽어가는 한 마리를 집사님 댁으로 옮겨 지극정성으로 돌보니 다행히도 살아났다고 한다. 아이들의 기대 속에 태어난 생명이 죽었다는 사실에 아이들의 동심을 파괴할까 봐 걱정했는데 한 마리라도 살아났다니 얼마나 감사한지…:
우리집 거실이 어수선하다. 이번 주일 저녁이면 딸아이가 수단난민학교(Day spring)를 돌보기 위해 이집트 카이로로 간다. 딸아이 짐들로 거실이 어수선하다. 내 맘 같아서는 1년 정도만 난민학교에 헌신하고 공부하기를 원했는데 3년째다. 휴스턴만 오면 아이들 눈망울이 생각난다고 한다. 그곳에서는 앨러지로 앨러지 약을 달고 살아야 하고, 불편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닐 텐데도 아이들의 눈망울이 모든 것을 이기게 하나보다. 솔직히 이런 딸의 모습이 대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에 안 든다. 처음에는 결단하고 떠나는 딸아이를 보고 성도님들이 “역시 목사님 딸이다”“어떻게 믿음으로 잘 키웠느냐”는 칭찬이 좋았다. 그러나 시간이 길어지면서 “이번 학기가 마지막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보내고 있다. 내가 능력 있어서 학비라도 지원해 주면서 공부 더하라고 하고 싶지만 능력 없는 나를 탓하며 보내고 있다. 그런데도 딸아이는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갈 때가 되면 거실 가득 가방을 펼쳐놓고 이것저것 챙긴다. 대다수가 난민학교 아이들 것이다.
나는 천국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이다. 이 땅이 전부가 아닌 사람이다. 나의 처소가 예비되면 예수님이 나를 데리러 온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이 가. 그리고 나는 이
사실을 강대상에서 목이 터져라 외치고 있다. 그런데도 딸아이를 보낼 때면 불편하다. 아직도 딸아이의 미래를 걱정한다면서 불편해한다. 그런데 오늘 본능적인 모성애로 새끼를 키우는 어미 염소도 갑자기 찾아온 한파에는 어쩔 수 없어하는 것을 보았다. 새끼를 잘 키우려 해도 기후변화에 어쩔 수 없이 눈물 젖은 목소리로 음메 거리는 어미염소를 보았다.
무엇이 행복일까? 인생은 짧은데 무엇이 행복일까? 하나님 안에서 가치 있는 일을 찾고 그 일에 헌신하는 것이 참 행복 아닐까? 딸아이가 진짜 내 딸이 아니고 하나님의 딸이라면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리고 딸아이가 행복해하는 일이 있다면 같이 기뻐하고 행복해하는 것이 참된 아빠의 모습이 아닐까?
딸아이가 이집트로 가기 전에 생굴을 먹고 싶다고 한다. 생굴을 파는 허름한 가게에서 딸아이와 생굴을 먹으면서 딸아이를 축복해 본다. 예측 없이 불어오는 인생의 한파를 한파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기회로 여기면서 행복을 누리는 딸이 되도록 축복해 본다.
홍형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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