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일기 7월 13일
요즘 아침저녁으로 성전에서 부르짖고 있다.
어느 때는 옆구리가 아프도록 큰 소리로 부르짖다가 어느 때는 졸기도 한다. 이렇게 기도하다 보니 피곤하고 내 시간이 없다. 그러기에 자연스럽게 “나는 왜 이 자리에 있는가?”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왜 기도할까? 억지로 기도의 자리에 나온 내 자신이 보여 기도를 멈추는 것이 신앙의 결단일 것 같은 유혹도 든다. 분명히 답답해서 시작한 기도이지만 내 속에 다른 동기가 있다.
금식기도나 작정기도 할때마다 갖는 생각이 기도하는 내 모습을 보고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시지 않을까? 그래서 내 삶에 평탄을 주시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다. 그래서 때론 가슴이 터져라 외치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함으로 잉태된 아이가 죽을병에 걸리자 금식하며 땅에 엎드려 기도하던 모습과 같은 동기이다.
“이러면 하나님이 봐주시지 않을까?”
그런데 하나님은 다윗이 기도를 시작한지 7일만에 아이를 데려간다.
금식하고 기도했지만 상황이 달라진 것이 없다. 그런데 아이의 죽음 앞에 다윗의 행동이 놀랍다. 아이의 죽음을 알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몸에 기름을 바르고, 옷을 갈아입고 음식을 먹는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미한다. 충격 먹어 제정신이 아닌것 같다.
하지만 이것은 놀라운 신앙고백이다 다시 말해 다윗이 변한 것이다.
기도했기에 결과에 후회 없이 하나님을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는 없지만 밧세바에게 엄청난 위로가 있었을 것 같다.
밧세바는 다윗을 만난 후 남편 우리아가 죽고, 아이가 죽었다. 이 충격이 어떠했을까? 다윗에 대해 엄청난 상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솔로몬을 잉태케 하여 밧세바를 위로한다. 이것도 기도 응답이다.
그렇다. 모든 기도는 응답 된다. 어떻게든 기도한다는 것은 믿음이다.
하나님이 나의 기도의 모습을 “봐주시면 좋겠다”라고 시작한 얄팍한 기도 속에서도 하나님은 역사하신다.
더 기도의 자리에 머물러야겠다.
홍형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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